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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답답한 마음을 史로 잡다

행복한 0 11 02.21 04:59
사극 열풍이 거세다. 묵직한 정통 사극부터 코믹, 액션, 멜로, 퓨전까지 장르의 변주도 다채롭다. 지난해 종영한 MBC 사극 <연인>의 인기 배턴을 이어받아 올해 KBS2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과 MBC 가상역사극 <밤에 피는 꽃>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tvN 픽션 사극 <세작, 매혹된 자들>이 합류하며 사극 전성시대 굳히기에 나섰다. 사극은 꾸준히 안방극장의 문을 두드렸지만 동시에 이렇게 많은 작품이 사랑을 받는 일은 흔치 않다. 왜 지금, 사극이 우리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것일까.
현실 고단할수록 과거에 끌려
사극의 인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사극은 역사(史)와 극(劇)을 합친 말로, ‘역사에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연극이나 희곡’이다. 국내 안방극장에 처음 등장한 사극은 1962년 KBS에서 방송된 <국토만리>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를 바탕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사극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이후 고전과 왕조사를 소재로 사극은 시청자들에게 굵직한 감동을 선사해왔다.
전문가들은 옛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말한다. 역사적 사건과 과거의 인물이 강한 극적 요소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사극 속 신분 체계는 현대물보다 억압적인 환경을 만들고, 이미 벌어진 역사인 만큼 개연성이 있다면서 사극이 다른 장르보다 서사성과 극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역사적 사건·인물 빌려 현실 비판하는 형태현실 속 좌절하는 이들에 통쾌한 위로 선사표현의 자유 억압받는 시기에 몰입도 커져
그렇지만 사극의 인기를 단순히 옛이야기가 가진 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사극이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적도 많다. 2007년 <이산> <왕과 나> <태왕사신기> 등이 ‘시청률 대박 사극 시대’를 누린 것과 달리, 2년 뒤인 2009년 <자명고> <돌아온 일지매> 등은 시청률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못하며 사극 불패 공식을 깨뜨렸다.
최근 몇년간 대하 사극은 막대한 제작비에 비해 시청률과 화제성이 떨어진다는 평이 이어졌고, 제작을 기피하는 분위기도 생겨났다. KBS가 270억원을 들여 대하 사극을 제작한다고 발표했을 때 사활을 걸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다행히 <고려 거란 전쟁>은 정통 사극 최초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넷플릭스 국내 시리즈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고려와 거란의 밀고 당기는 외교 싸움, 강대국 거란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고려군의 기개 등이 흡인력을 만들어낸다. 전문가들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과거를 돌아보는 사람들의 심리가 사극 인기 요인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정 평론가는 사극은 옛이야기로 현재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갈증을 풀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며 대체로 선거를 전후해 대하 사극이 인기를 끌곤 했는데, 대중의 정치적 열망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시대 갈증 콕 짚어주는 사극
고려의 상황과 지금 한국의 외교 환경이 겹쳐 보인다는 지적도 있다. 1000년 전 거란이 동북아시아 신흥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고려를 포함한 주변국을 압박했듯이, 지금의 한국 또한 미·중 갈등 속 난감한 입장과 북한의 도발, 일본과의 외교 난제 등에 직면해 있다. 당시 고려가 현종, 강감찬, 양규 등 빼어난 리더십을 바탕으로 난세를 극복해나간 것처럼 이 시대에도 그런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국어국문학)는 역사 드라마는 과거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현시대 사람들이 사회에 가진 불만을 투영하는 창이기도 하다면서 고된 현실 속에서 정치·사회·경제를 비판하기가 쉽지 않을 때 사극이 불만 표출의 우회로처럼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특히 ‘표현의 자유’가 억압받는 시기에 정통 사극 인기가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면서 현대극으로도 자유롭게 정치사회 비판이 가능했던 시기에는 우회적으로 사극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최근 사극 열풍에 합류한 <세작, 매혹된 자들>에서 순수한 충심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던 이인(조정석)은 임금이 된 뒤 매섭고 날카롭게 돌변한다. 윤 교수는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사극을 통해 권력의 속성과 본질에 대해 엿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밤에 피는 꽃> 또한 대중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낸다. 결혼 첫날 얼굴도 못 본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홀몸이 된 주인공 조여화(이하늬)는 밤마다 복면을 쓴 채 한양 곳곳을 누비며 악인을 응징하고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 ‘정의’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가려운 곳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다. 정 평론가는 홍길동 여성버전인 셈인데, 여성 영웅을 내세운 점이 인상 깊다면서 2021년 방영된 <옷소매 붉은 끝동> 같은 경우도 왕인 이산이 아닌, 궁녀인 성덕임의 시선에서 극을 풀어가는 등 사극 또한 ‘여성 서사’로 무게중심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밤에 피는 꽃> 제작진은 현실에 치인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 이샘 작가와 함께 <밤에 피는 꽃>을 집필한 정명인 작가는 담 넘고 선 넘는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조선시대 가장 많은 제약을 받았던 여성, 그중에서도 과부라고 생각했다며 힘겨운 처지에 서 있던 조여화라는 인물이 일단 한번 용기를 내어 담을 뛰어넘고 인스타그램 팔로워 구매 선을 건너보라고, 그러면 결국 그 담이 무너지고 선은 없어질 거라고 유쾌하고 용감하게 몸소 행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실에 지쳐 좌절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주인공의 용기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다는 주제 의식을 통쾌하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종영한 <연인> 또한 이 시대 젊은이들의 현실과 갈망과 공명했다.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과 백성들의 이야기는 결혼은커녕 연애도 힘든 요즘 세대의 마음을 울린다. 정 평론가는 사극이 퓨전 형식을 빌려 멜로를 풀어내는 부분은 현실적으로 결혼조차 힘든 대중들의 갈망을 사극 안에서 풀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열녀박씨혼례대첩> 등도 불합리한 결혼 제도 속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사극으로 풀어냈다.
그렇지만 대중의 갈증을 꿰뚫는 기획 의도만으로는 드라마를 성공시킬 수 없다. 걸출한 연기, 정교한 연출, 최첨단 컴퓨터 그래픽(CG)과 시각특수효과(VFX) 기술 등이 사극과 만나며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명품 연기에 컴퓨터 그래픽·특수효과 더해옛 문헌 속 대목, 생생한 장면으로 되살려코믹함 녹일 땐 액션은 ‘과장’ 멜로는 ‘은은’
특히 <고려 거란 전쟁>의 생생한 전쟁 장면은 스파르타 용사 300명의 처절한 싸움을 그린 영화 <300>을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고 있다. 삼수채 전투와 흥화진 전투는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으로 꼽힌다. 삼수채 전투는 강조가 처음 출전하는 전투로, 검차가 등장한다. 고려군의 검차와 거란군의 말을 의인화해 표현했다. 말들이 검차를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을 연출해 생생함을 더했다.
이 장면에 숨은 비밀도 있다. 드라마에 VFX 효과를 입힌 비브스튜디오스는 실제로 촬영할 때는 검차 5대만 사용한 뒤 CG 작업을 통해 대수를 늘려 구현했다며 고려군이 돌팔매를 던지는 등의 기병 전술에서도 CG 기술이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흥화진 전투에서는 명장면이 대거 등장한다. ‘빛의 전투’로도 불리는 공성전에서 거란군의 규모를 표현하기 위해 CG로 수많은 불덩이가 날아오는 장면을 제작했다. 성벽에 쌓인 시체들은 마치 ‘지옥도’를 연상시키도록 미술팀과 협업을 통해 구현했다. 대규모 병력인 거란군과 기병 장면도 CG의 손을 빌렸다.
‘애전 전투’를 끝으로 양규와 김숙흥이 전사하는 장면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제작진은 촬영 당시 추운 날씨 때문에 배우들의 입김이 카메라에 담겼는데, 입김을 지우는 대신 CG로 더 뚜렷하게 만들어 전쟁의 처절함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칼이 갑옷과 부딪칠 때 튀는 불꽃, 전투 시 흩날리는 먼지와 작은 파편 조각까지 CG를 거친 것이다. 특히 양규는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적의 화살을 맞은 채 서서 죽는다. <고려서> 양규 열전에 실린 ‘양규와 김숙흥은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맞고 함께 전사하였다’는 내용을 눈앞에 펼쳐 보인 것이다.
제작진은 마지막까지 화살을 꼭 쥐고 있던 양규의 죽음은 연기, 연출, VFX 기술이 조화를 이뤄 만들어낸 명장면이라고 설명했다.
<밤에 피는 꽃>은 사극에 코믹, 액션, 멜로를 균형 있게 녹여내는 점에 중점을 뒀다. 장태유 감독은 드라마 속 시대의 코미디는 어떠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강력한 여성 히어로지만 허당기와 인간미로 무장한 과부 여화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액션은 오히려 과장되게 표현했다.
장 감독은 통쾌하지만 불쾌하지 않으려면 액션이 리얼하기보다는 만화처럼 보이기를 원했다면서 또 과부의 멜로는 자칫 19금으로 비칠 우려가 있어 은은하게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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