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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낡고 해져도···“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없다”

행복한 0 11 03.23 14:21
제주 포도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이 말에서 시작됐다.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16세기 프랑스 작가 니콜라스 세바스티안 드 샹포르가 남긴 말이 실마리가 돼 노화와 인지저하를 주제로 한 전시가 탄생했다. 루이스 부르주아, 로버트 테리엔, 시오타 치하루, 정연두, 민예은 등 국내외 작가 10인의 작품을 통해 노화로 인한 기억의 해체와 재구성, 고립과 고통, 돌봄을 통한 새로운 관계의 형성 등 나이 듦을 둘러싼 다채로운 풍경을 눈 앞에 펼쳐 보인다.
누구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노화와 인지저하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부르주아의 설치작품, 일본 출신 인기 설치미술 작가 시오타 치하루의 신작 등도 함께 선보여 공감대와 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를 두루 느낄 수 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문짝들이 벽처럼 둘러싼 좁은 방, 문틈 사이로 앙상한 철제침대가 보인다. 오래 앓던 이가 묵었던 것을 암시하듯 유리병과 의료도구가 테이블 위에 흐트러져 있다. 침대 위에는 나에겐 기억이 필요해. 그것은 나의 기록들이다(I need my memories, they are 인스타 팔로우 구매 my documents)라는 붉은 색 글씨가 써 있다.
거미 모양의 조각물 ‘마망’으로 유명한 루이스 부르주아는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 볼 수 있는 설치작품 ‘밀실1’을 선보인다. 1991년 작품으로, 유년 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다룬 작품이다. 좁은 방을 가득 채운 어머니의 물건들이 아픈 어머니의 고통과 심리적 고립을 보여준다면, 좁은 문틈과 창문을 통해서만 방 안을 볼 수 있게 만든 구조는 지켜보는 이의 두려움과 불안, 거리감을 느끼게 해준다. 부르주아는 여섯 점의 ‘밀실’ 연작을 만들었는데, 포도뮤지엄에서 볼 수 있는 ‘밀실1’은 첫 번째로 만든 작품이다.
백발의 노인이 몸을 두 팔로 감싼 채 눈을 감고 있다. 알몸이라 추울 것도 같지만 얼굴에 드리운 밝은 햇빛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노인은 목에 평소 아끼던 묵주와 목걸이를 소중하게 걸었다.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노인은 아기처럼 보인다.
미국의 사진작가 쉐릴 세인트 온지는 혈관성 치매 진단을 받은 어머니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햇빛 속에 백발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 반려견과 놀이를 하거나 농장의 말과 머리를 맞댄 모습 등 어머니의 일상 속 평화로운 모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담았다. 온지의 ‘새들을 집으로 부르며’는 전시에 온기와 감정적 생기를 불어넣으며 관람객들이 감정적으로 가까이 다가가 전시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처음엔 아픈 어머니를 촬영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날 ‘엄마, 사진 찍어볼까’라고 묻자 어머니가 똑바로 앉아 머리를 매만졌죠. 근육이 기억을 하듯 포즈를 취하셨어요. 사진을 찍으면서 어머니와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이 늘어났어요. 인지저하라는 새롭게 맞닥뜨린 현실에서 어떻게 어머니와 관계를 쌓고 사랑을 공유할지 고민한 결과가 이 작품입니다. 지난 19일 포도뮤지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온지가 말했다.
온지의 작품은 인지저하가 삶의 붕괴를 의미하지 않으며,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관계맺기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다.
민예은의 ‘기억이 어떤 형태를 이룰 때’는 방의 한 모퉁이를 썰어낸 듯한 공간들을 전시장 곳곳에 흩뜨려 해체되고 조각난 기억의 인스타 팔로우 구매 순간들을 보여준다. 거꾸로 매달린 시계, 잘려진 달력 등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 초현실적 시간대로 관람객을 초청한다.
같은 공간에 전시된 미국 작가 로버트 테리엔의 설치작품 ‘무제(패널룸)’는 거대한 나무 컨테이너 안에 수수께끼 같은 공간을 연출해 민예은의 작품과 조응한다. 고급스런 마호가니 원목을 사용한 고택의 방 같은 공간 한 쪽엔 천장의 비상탈출구로 이어지는 철제 사다리가 설치돼 있다. 바닥엔 뜬금없이 낡은 탬버린들이 놓여 있다. 기억의 뒤섞임 속에 만들어진 낯선 공간같은 느낌을 준다.
멕시코에서 활동하는 작가 데이비드 벅스의 ‘재구성된 풍경’은 건축현장에서 수거한 커다란 목재 위에 푸른 하늘과 초원을 그려넣은 뒤 망치로 부순 다음 파편을 그러모아 새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시오타 치하루는 ‘끝없는 선’에서 집필용 책상이 한가운데 있는 공간에 알파벳 철자가 달린 검은 실을 수없이 많이 늘어뜨렸다. 기억을 구성하는 언어와 문자들이 해체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검은 실들 사이에 달린 하얀색 철자들이 새로운 말과 기억을 만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작품들은 노화로 인한 기억의 상실과 해체를 그리면서도, 조각나고 파편화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관계와 현실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샹포르의 말을 바꿔 말해보자면 ‘모든 날 중 완전히 잃어버린 날은 없’는 셈이다.
전시를 기획한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은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진입하는 오늘날, 노년의 삶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에 온기를 더하고 세대 간 공감을 모색하고자 마련했다며 인지저하증을 통해 한 사람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고독을 순간을 예술적 시선으로 집중하고자 했다. 인지저하증은 단순한 질병의 형태를 넘어서 영혼의 가장 외딴 구석까지 탐험하게 하는 은유라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3월20일까지.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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