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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년…잊혀진 고통, 수단 내전

행복한 0 8 04.17 03:58
북아프리카 수단에서 발생한 내전이 15일(현지시간)로 1년을 맞았다. 그사이 1만6000여명이 숨지고 피란민이 850만명을 넘어서는 등 위기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관심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쏠린 탓에 시민들의 고통은 방치되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유엔 세계보건기구 대변인 크리스티안 린트마이어는 지난 12일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수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내 난민 위기를 겪고 있다며 기아 등 인도적 재앙은 주변국에도 번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위기는 1년 전 정부군과 준군사조직인 신속지원군(RSF)이 무력충돌을 하면서 시작됐다. 두 조직은 2019년 쿠데타를 일으켜 30년 장기 집권한 독재자를 축출한 이후 권력다툼을 벌이다 지난해 4월15일 정부군의 편입 통보에 RSF가 반발하면서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RSF는 수도 하르툼과 서부의 다르푸르를 거점으로 교전을 지속하고 있다.
내전이 지속되면서 1년간 사망자는 군인을 포함해 1만6000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피란길에 오른 850만여명 중 주변국으로 떠난 이들은 약 200만명에 이른다. 지난 1년간 1000만명이 넘는 아동이 폭탄 테러와 성폭력 등에 노출됐다고 세이브더칠드런은 분석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유엔에 따르면 수단 인구 4900만명 중 절반가량이 식량과 식수를 구하지 못해 인도적 지원이 필수적인 상태에 놓였지만, 당장 필요한 27억달러(약 3조7381억원) 중 확보된 자금은 약 5%뿐이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최근 성명을 통해 국제사회의 방치 수준은 충격적이라고 지적했다.
내전 발발 1년을 맞은 이날 프랑스 파리에서는 수단을 인도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오는 18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휴전 협상이 재개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협상이 이뤄지더라도 내전이 종식될지는 불투명하다. 이전에도 수차례 정전 합의가 이뤄졌지만 정부군과 RSF 양측이 모두 이를 지키지 않으면서 교전이 계속돼왔다.
한국의 보수가 갈 길을 잃었다. 보수의 이념은 실종되고, 보수적 정책은 효율성을 상실하고, 무엇이 보수 집단의 정체성인지 모호하다. 기형적 대통령제에서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을 보유하였음에도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한 것은 한국의 보수가 정치적 나침반을 잃어버렸다는 분명한 징후이다. 이런 징후는 이미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진 촛불집회에서 명약관화하게 드러났지만, 보수 세력은 당내 민주화를 통해 정치문화를 혁신하는 대신 과거 권위주의적 행태를 답습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거리낌 없이 거론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지금의 모습은 보수의 혼돈과 종말을 보여준다.
보수가 패배했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정권을 잡기 위해 정당하게 경쟁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 패배는 결코 몰락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해 패했다면, 국민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도록 성찰과 혁신을 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보수가 길을 잃었다는 것은 이들에게 성찰과 혁신의 가능성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험난한 탄핵 정국의 위기에도 변하지 않은 보수가 과연 총선 실패로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을까? 만약 이번에도 서로 책임을 돌리다가 혁신의 기회를 놓친다면, 보수는 영원히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보수가 스스로 못 변한 게 큰 이유
보수의 실패가 한 정당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보수의 실패는 외견상 진보의 승리처럼 보인다. 승자독식 소선거구제에서 한 정당의 승리는 반드시 다른 정당의 패배이다. 22대 총선에서 국민의 약 45%가 국민의힘 후보에게 투표했음에도 두 정당의 지역구 의석수 차이는 약 1.8배에 달한다. 국민의 의사가 기형적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제도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진영정치는 선거를 ‘제로섬게임’으로 만든다. 한쪽이 이겨도 다른 쪽에 치명적 손해가 생기지 않거나 선거 결과가 전체의 이익을 증대한다면 패배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제로섬게임은 패자뿐만 아니라 승자에게도 이롭지 않다. 승자는 타협과 협력을 추구하는 대신 배제와 분열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관용의 여유가 없는 것은 패자나 승자 모두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저울질하고 균형을 맞추며 합의점을 찾아 특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여론을 중시하고 국민의 다양성을 높이 존중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여러 정당 간 경쟁이 공공선을 증대한다. 정치는 결코 제로섬게임이 아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양극화가 심화함으로써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한 사람의 이익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손실이라는 ‘제로섬 사고’가 대중 담론에서 점점 더 자리를 잡게 된 데 있다. 경제적 양극화, 기후변화, 인공지능(AI), 젠더 갈등, 난민 문제 등 오늘날 우리 삶을 위협하는 문제들은 너무도 복잡해서 어느 것도 단기에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가 합리적 토론과 장기적 계획을 요구한다. 분열과 증오가 일상화된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합리적 문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특정 계층과 집단의 이해충돌과 반대의견 때문에 문제 해결 자체가 곤란해진 사회를 ‘제로섬사회’라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여야가 타협과 협력의 문화를 만들어가길 기대하는 것은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보수가 길을 잃으면, 진보도 길을 잃는다. 결국 사회 전체가 길을 잃을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우선 보수가 왜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었는지 처절하게 성찰해야 한다. 정치평론가와 정치학자들이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겠지만, 나는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했는데도 보수가 스스로 변하지 못한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라고 생각한다. 변화된 상황에서 스스로 변하지 않는 가치는 타당성이 없다. 가치의 지향성을 잃어버린 보수는 단순한 이해집단으로 전락한다. 무엇이 우리가 지켜야 하는 가치인지가 불분명하다면, 누가 보수라고 자처하겠는가? 보수는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몇몇 수식어를 첨가함으로써 외관을 바꿔왔다. ‘합리적 보수’ 또는 ‘따뜻한 보수’로 변신하다가 ‘진보적 보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얼굴에 쓰는 가면이 바뀌면 인격도 달라져야 하는데, 보수의 얼굴은 언제나 구태의연했다.
제로섬 사회서 보수가 변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보수를 어떤 이미지로 보고 있는가? 보수는 본래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고 유지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보수는 어떤 가치를 보존하려고 하는가? 보수는 전통적으로 ‘권위주의’ ‘자유주의’ ‘실용주의’로 대표된다. 프랑스 대혁명을 비판하며 현대적 보수주의를 정립한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게 정치는 권위이다. 버크에 의하면 국가는 결코 도덕적 청산, 국가 혁신, 급진적 혁명을 통하여 쉽게 분해하고 재조립할 수 있는 레고 블록 구조물이 아니다. 국가는 역사와 전통으로 만들어진 태피스트리와 같아서 한 가닥의 당겨진 실이 전체 패턴을 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취급되어야 한다.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는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선호한다.
따라서 보수는 급진적 변화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시대가 변하면 가치와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어떤가? 보수는 차별금지법 처리 과정에서 보여준 것처럼 변화 자체를 반대하는 듯하다. 유가적 가치가 완전히 해체된 지금 보수는, 물론 이 점에서는 진보도 다를 바 없지만, ‘권위주의’만을 답습하는 것 같다. 이준석, 나경원, 김기현처럼 조금만 다른 목소리를 내도 가차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없이 내치는 윤석열 대통령의 태도에서 일반 국민은 권위주의의 왜곡된 실상을 본 것이다. 22대 총선 결과는 국민이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얼마나 싫어하고 경멸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반권위주의 문화가 널리 퍼져 있는데 권위는 없으면서 권위주의만 고집하는 보수당은 그저 ‘꼰대당’으로 각인될 뿐이다. 제로섬사회에서 한쪽이 권위주의적이면 마치 다른 쪽은 덜 권위주의적인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상식을 파괴하는 정치
바보야, 문제는 사람이야
‘위선 공화국’의 역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보수의 이미지는 ‘자유주의’로 대변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윤 대통령은 가장 적극적으로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대통령이다. 윤 대통령은 어떤 자유주의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틈만 나면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고 시장경제에 기반해 성장의 기틀을 세운 어르신들의 헌신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 시장의 혜택을 받기 때문에 국가가 자원 재분배를 통해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더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양극화가 일어나면서 시장이 모든 사람에게 이롭다는 확신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차별을 경험한 사람, 교육이나 취업 시장에서 기회가 거의 없는 사람, 소수민족에 속하거나 구조적으로 취약한 지역에 사는 사람은 제로섬 사고가 훨씬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로섬 사고는 실패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작용이다.
보수는 언제나 실용적인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이념은 설령 선명하지 않더라도 경제는 훨씬 더 잘 운용하는 집단이라고 여겨졌다. 독일 보수당인 기민당의 총리였던 메르켈은 여러 사회문제에 실용적인 정책을 통해 유연하게 대처할 때는 성공하였지만, 난민 문제를 도덕적·이념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정권을 잃었다.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녹색당의 정책을 과감히 수용하고, 새로운 빈곤이 출현하면 진보당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실행하고,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심각해지면 자유방임 경제 노선을 버리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탄력성과 유연성을 보인 것이 보수였다. 22대 총선은 이런 확신이 깨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윤 대통령의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국정 운영은 실용주의와 거리가 멀다. 한국의 보수는 변화된 사회에서 변하지 않아 갈 길을 잃었다. 다시 길을 찾으려면 보수가 철저하게 환골탈태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제로섬사회에서 보수가 과연 바뀔 수 있을까?
스물여덟, 우리들의 못다한 수학여행
배우러 가는 여행이었다. 수학여행이었다. 배울 것은 차고 넘쳤다. 열여덟은 자고 일어나면 조금 크고, 자고 일어나면 조금 더 클 때였다. 길가에 핀 꽃 한 송이에서도, 햇볕에 반짝이는 바다에서도, 친구들과 소곤거리며 나누는 대화에서도 배울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여행이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든, 여행의 시작과 끝은 이미 상관없었다. 누구와 버스 옆자리 짝이 될지, 누구와 같은 방을 쓰게 될지를 더 고민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꺄르르 웃고, 해가 내리쬐면 또 그대로 꺄르르 웃는 여행이었다. 여행이어야 했다.
2014년 4월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2학년 1·2·3반은 섭지코지·산굼부리·정방폭포에서, 4·5·6반은 섭지코지·용머리해안·정방폭포에서, 7·8·9·10반은 산굼부리·용머리해안·한림공원에서 도착하자마자 단체 사진을 찍기로 되어 있었다. 몇주 전 학교에 핀 벚꽃 아래에서도 반별로 사진을 찍었다. 그때처럼 누구는 앉고 누구는 서고 누구는 목말을 타고 누구는 누구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함께 카메라를 보고 웃을 예정이었다. 떠들썩하다가도 찰칵 소리가 나면 온 세상이 조용해질 거였다. 한창 유채꽃이 피어있을 제주도의 노란빛을 기대하며 떠난 여행이었다.
제주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수요일이었다. 수천 번의 ‘만약에’와 수만 번의 절망과 기다림, 분노가 있었다. 전국의 수학여행은 모두 취소되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도 그중 하나였다. 똑같이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는 일정이었다. 우리였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결국 우리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뉴스를 보며 울고 화냈을지언정 삶이 멈추진 않았다. 나는 잃은 것이 없었다. 수학여행을 못 간 것쯤은 잃은 것이 아니었다.
이번 봄에도 제주는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열번째 봄이었다. 10년 전 못 간 수학여행을 다시 가는 셈 치고 제주로 가는 배를 탔지만 이 여행은 수학여행이 아니었다. 혼자 가는 수학여행은 수학여행일 수 없었다. 열여덟의 마음에서 이미 멀어진 나는 수학여행을 떠날 수 없었다. 거기 있었을지 모를 너와, 너의 친구들과,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괜히 빈 뷰파인더에 대고 한마디씩 건네는 게 다였다. 아마 이쯤 앉아있었겠지, 아마 이쯤 서보라고 했겠지, 아마 이런 걸 신기해했겠지 하는 모든 가정은 결국 가정일 뿐이었다. 푸른 봄을, 노란 봄을, 반짝이는 봄을, 희미한 봄을 보면서 그 어디론가 시간여행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이 너희와 겹쳐 보였다. 꼭 수학여행으로 온 학생들만은 아니었다. 이제 걸음마를 뗀 너도, 세월만큼 얼굴에 주름이 새겨진 너도 있었다. 너는 아빠한테 업혀 사진을 찍고는 힘들다고 했고, 너의 아빠는 업은 건 난데 네가 뭐가 힘드냐고 했다. 너는 바닷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정리해 가며 친구들과 셀카를 찍었다. 너는 귤 모양 핀을 머리에 꽂고 걸었다. 너는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 앞 바위에 올라서서 슈퍼맨 포즈를 지었다. 크고 작은 돌을 밟으며 지나가야 하는 바닷가에선 서로 손을 잡아줬다. 너는 유치하다면서도 공원 안에 있는 악어를 한참 동안 바라봤고, 말이 언덕을 달려가는 걸 난생처음 본다는 듯이 지켜봤다. 너는 한라봉 초콜릿이 담긴 흰색 비닐봉지를 들고 줄 맞춰 걸었다. 10대인 너도, 50대인 너도 있었다. 10대인 나도, 50대인 나도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매표소에서 서로를 지났을지도, 비에 질척이며 남은 네 발자국이 없어지기 전에 내가 다시 그 땅을 밟았을지도, 내가 찍은 사진 구석 어딘가에 너와 네 친구들이 조금 담겼을지도. 하지만 10년을 지나 스물여덟이 된 나는, 그래서 서른여덟도 마흔여덟도 될 나는, 아직 열여덟인 너희에게 숨 한 모금씩 빚졌을 수밖에. 이제야 10년 전 어른들처럼 미안한 마음이 든 건 그래서일 수도 있겠다.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던 열여덟이 아니라서, 열여덟이 얼마나 어리고 아까운지 아는 어른이 되어서.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더 이상 같이 욕하기만 할 수 없게 되어버려서 조금은 더 마음이 무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시작하지 못한 여행에서도 배웠다. 멈춰도 그만두지 않는 생을 통해, 혐오에 혐오로 맞서지 않는 어른들을 통해, 여전히 세상을 믿는 아이들을 통해, 길에 지나다니는 노란 리본을 통해 배웠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마음을, 그럼에도 웃는 마음을 짐작해 가며 배웠다.
출발하기 전 나는 무사히 배가 제주항에 도착하면 여행이 끝난 기분일 것 같았다. 모든 여행의 끝은 돌아옴이니까, 제주에 도착하는 것이 돌아오는 거였으니까. 다시 제주를 떠나오기 전에 나는 이 여행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우리는 세월호를 떠나왔지만 세월호에 돌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산굼부리 안에 있는 기념품 가게 앞에는 너와 함께라면 인생도 여행이다라는 문구가 네온사인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네가 없는 여행이라 재미없는 게 맞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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