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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튀는 기자 가 안 보인다 딱 한명 기억에 남는 사람은

라이더 0 52 07.05 18:46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예상치를 뛰어넘는 2분기 실적을 예고했습니다.
반도체 호황과 계절적 성수기 덕분에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주력 부문이 모두 좋은 실적을 거둔 것으로 풀이됩니다. 이민후 기자입니다. 삼성전자의 2분기 매출은 74조 원 영업이익은 10조 4천억 원으로 모두 1년 전보다 대폭 늘었습니다.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이 10조 원을 넘어선 건 지난 2022년 3분기 이후 2년 만입니다. 영업이익은 시장 예상치인 8조 원 대보다 2조 원가량 웃돌았습니다. 증권가에서는 메모리 호황에 반도체 부문에서 영업이익을 6~7조 원가량 거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바일 쪽은 인공지능 스마트폰인 갤럭시 S24의 수요세가 강했지만 부품값 상승으로 2조 원대 영업이익에 그쳤고 디스플레이는 약 1조 원 가전 부문은 6천억 원대의 영업이익을 기록한 것으로 증권가는 보고 있습니다. LG전자는 2분기 매출 21조 7천억 원 영업이익은 1조 2천억 가량을 기록하면서 1년 전보다 모두 상승했습니다. 2분기 역대 최대 실적을 내고 분기 연속 영업익 1조 원을 달성했습니다. 주력인 가전 부문과 신성장 동력인 기업간거래 부문의 질적 성장 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기후 온난화와 이른 여름철이 맞물리면서 에어컨이 많이 팔렸고 B2B 부문에서 냉난방공조 사업이 호조세를 띈 것으로 분석됩니다. 양사는 이번달 말 실적발표회를 열고 구체적인 사업부문 별 실적을 발표합니다. SBS Biz 이민후입니다. 당신의 제보가 뉴스로 만들어집니다. SBS Biz는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 생활 속 잇한 소식 슬기로운 생활뉴습니다. 다음 달부터 주택용 도시가스 요금이 6. 8 인상됩니다. 한국 가스공사는 8월부터 주택용 도시가스 도매 요금을 서울시 소매요금 기준으로 메가줄당 1. 41원 올린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서울시 4인 가구 기준으로 한 달에 약 3 770원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인상 배경에 대해 가스공사는 현재 부채비율이 600 를 상회하고 미수금에서 발생하는 이자 비용이 연 5천억을 초과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민수용 도시가스 요금 인상은 지난해 5월 이후 1년여 만입니다. 서울 강남 3구의 아파트 청약 경쟁률이 평균 71대 1에 달하는 등 매년 경쟁률이 치열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9년부터 지난달 19일까지 서울 강남 서초 송파구 26개 단지에 5 871가구가 분양했고 평균 경쟁률은 71대 1을 기록했습니다. 또 이 기간 청약통장의 4분의 1이 강남 3구 청약에 몰렸습니다. 강남 3구 1순위 청약 경쟁률은 2019년 42대 1에서 이듬해 87대 1로 두 배 이상 뛰었고 지난해 152대 1을 기록했습니다. 강남권 아파트 당첨의 최저 가점은 2019년 평균 60점이었으나 2020년 64점 2021년 73점으로 매년 올랐습니다. 세탁소에 신발 세탁 맡겨보셨나요 신발세탁 관련 소비자 불만이 최근 3년간 3 893건으로 매년 천 건이 넘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한국소비자원이 신발세탁 관련 심의 685건을 분석한 결과 세탁업체의 잘못 으로 판정된 경우가 361건으로 절반을 넘었습니다.
피해 유형별로 보면 세탁 방법 부적합 이 78. 1 로 가장 많았는데요. 신발의 경우 세탁법과 같은 취급 표시 사항이 제품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지금까지 잇한 소식 슬기로운 생활뉴스였습니다. 연합뉴스TV 기사문의 및 제보 카톡/라인 jebo23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한 기자들 이야기⑭이종욱 동아투위 위원 1974년 10월24일 발표한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다는 선언문에 따라 기자들은 자유언론 실천운동을 펼쳤고 그 과정에서 이듬해 3월 동아일보에서 130여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펜을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해직 후 50년 세월이 흘렀지만 기자들은 아직도 언론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자협회보는 1024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자유언론을 위해 분투하다 해직된 기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87년 9월1일 종로구 안국빌딩에 한겨레신문 창간사무국이 차려지고 창간기금 모금도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창간사무국으로 일터를 옮긴 나는 모금 일로 임재경 부사장과 함께 장덕진 회장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액수는 기억나지 않은데 기금 납입자로는 임 부사장 명의를 빌리기로 했습니다. 이 모금 때 창간 주주인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5000만원을 직접 전달했습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기부금도 아마 비슷한 액수였을 것입니다. 창간을 앞둔 어느 날 심채진 편집부장 이 부르더니 창간호 1면에 실을 백두산 사진을 보여주며 캡션을 써달라고 했습니다. 1988년 5월15일자 한겨레신문 창간호 1면에 실린 6천만의 그리움 끝이자 희망이 시작 백두산이라는 표제의 사진입니다. 물론 곧바로 끙끙대며 썼다. 다시금 돌이켜보아도 가슴 벅차집니다. 사진 설명은 백두산 천지 그 넘쳐흐르는 맑은 가슴은 43년 넘어 삭이고 또 삭이는 우리들 그리움의 끝이자 희망의 시작입니다. 한라산 백록담이 4천만의 것이 아니듯 백두산 천지도 2천만의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6천만의 것이어야 합니다. 한라와 함께 삼천리를 끌어안고 있는 백두는 우리더러 백두와 한라가 뜨거운 심장으로 용트림한 그날을 앞당기라고 몸부림치고 있다로 말문을 열고 신동엽 시인의 시구 를 슬쩍 비틀어 이제 백두산 천지를 보되 모오든 껍데기와 쇠붙이가 없는 한반도를 한눈에 보아야 한다로 마무리지었습니다. 임재경 부사장 겸 논설주간이 논설위원실로 불러 문화부장은 오래 하지 못했습니다. 난생 처음 쓰는 사설인데다가 노후한 인쇄기 탓에 마감시간마저 빨라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 한쪽 구석에 칸막이가 쳐진 책상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썼다. 포다이버스 논설간사 김종철 위원이 논설회의를 주재하고 나서도 자판을 두드리며 댓바람에 써내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논설위원실에는 이인철 권근술 선배도 있었습니다. 소설가 최일남 선생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 김금수 한국일보 출신의 한신대학교 교수 정운영 박호성 서강대 교수 그리고 창간사무국 고문 변호사 박원순 변호사가 비상임논설위원으로 일했습니다. 논설회의에 부지런히 참석한 박변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법률적인 접근이 필요한 꼭지가 걸리면 대놓고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동 구술로 술술 풀이해 주었습니다.
열심히 메모한 뒤 약간의 살을 붙이면 만사 해결이었습니다. 다소 까다로운 주제를 쓸 때면 자주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단체 어느 회사에나 파벌은 어김없이 존재합니다. 한겨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A파 B파로 나뉘었는데 A파는 DJ 지지 B파는 YS 지지로 분류되었습니다. 영호남 지역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한 셈입니다. 이인철 김종철 선배는 A파 권근술 성유보 선배는 B파로 간주됐습니다. 나는 경상도 출신인데도 A파에 속해 애꿎은 오해를 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공식적인 회식 외에는 식사나 술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사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속앓이가 심해 홍대입구역 인근의 정내과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위염이라고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내던 중 문화일보에 근무할 때 정기 건강검진에서 위암 초기임이 밝혀져 절반 이상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만두자 이인철 선배와 김근 위원이 동반 사직했습니다. 우리는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앞서 1991년 1월5일 다시 태어나야 할 겨레의 신문이라는 성명서 비슷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힘으로 몰아붙여 모든 것을 기정사실화하면 그만이라는 본질적으로 군사문화적 사고행태가 어느 사이에 한겨레신문의 조직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조직분열을 계속할 경우 한겨레신문은 민주화와 통일의 바다를 향한 항해를 멈추고 머지않은 장래에 파선할지도 모른다. 불합리한 인사안을 기획하고 그 인사안을 고집하며 편집국의 분위기를 편집권 독립이라는 외피를 입혀 반지성적이고 반이성적으로 몰아간 그들이 창간 당시부터 존재했던 오래된 파벌이었다라고 주장한 원고의 초안은 김근 위원이 작성했습니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수정해나갔습니다. 상근이사였던 조영호 위원도 가끔 합석했습니다. 우리가 느닷없이 사직하자 편집국 기자들은 모임을 갖고 우리들의 복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뜻에 따라 복직하고 나서 나는 홀로 초지일관 재차 사직했습니다. 튀는 기자가 그립다이듬해 집에서 쉬고 있던 나에게 국흥주 위원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리가 났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문화일보 이규행 사장은 촌지 받는 기자와 기사 표절하는 기자는 발각 즉시 자른다고 공표했었는데 연예문화부장이 발각되어 자리가 생긴 것입니다. 나는 이력서도 쓰지 않고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난 5월15일 부처님 오신 날 입사 동기생 홍종민 김진홍 위원의 뒤를 따라 떠난 국흥주 위원의 장기 입원도 발단은 업무 과다였습니다. 이규행 사장은 서울상대 직계 후배인 데다 다재다능하기까지 한 그에게 정경부장 의 업무 외에 국흥주 칼럼에 더해 사설까지 쓰게 했습니다. 그는 차붐 의 딸에게는 하나 아들에게는 두리 세찌라는 한글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이것이 널리 회자되기도 했다나는 1993년 11월 종합문화부로 이듬해 11월에는 한국일보 출신의 민병택 선배와 함께 논설위원실로 옮겼습니다. 1998년 문화일보를 그만둔 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언론중재위원회 중재위원으로 일했습니다. 언론중재 2004년 가을호에 실린 튀는 기자가 없다에 국흥주 위원을 언급한 대목을 다소 길게 인용합니다.
튀는 기자로 가장 기억에 남은 사람은 신문사 입사 동기인 국흥주 기자입니다. 그는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로 일할 때 당시 인기 절정이던 고등학교 야구와 월드컵 축구에 관한 장기 기획기사를 박학함과 독특한 문제 그리고 열의로 버무려 동아일보가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게 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동아사태 이후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김기만 기자가 대통령 공보비서관 시절 월간 시민체육 2002년 6월호에 쓴 글이 있습니다. 고교 시절 동아일보에 국흥주 기자가 월드컵 열전을 연재할 때는 너무나 재미있어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제일 먼저 도서관에 뛰어올라가 신문을 읽고 또 읽고 나중에는 노트에 기사를 베껴 집에 가 외우다시피 하곤 했습니다. 일간지 지면이 8면 체제이던 시절인 74년 1월부터 6월까지 무려 80회에 걸쳐 상당히 튀는 연재물 월드컵 축구 발자취를 게재했던 동아일보는 발행 부수를 대폭 늘려준 기자를 1975년 3월에 130여명의 동료 언론인과 함께 내쫓았으니. 뒤이어 튀는 발행인으로 문화일보 이규행 사장을 언급한 뒤 튀는 기사를 읽고 싶다. 튀는 기자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튀는 기자는커녕 그야말로 기레기 천지다. 이를 입증하는 해프닝이 최근에 벌어졌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5월24일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을 용산 대통령실 잔디마당에 초청해 만찬을 했는데 약 200여명의 기자에게 직접 끓인 김치찌개를 국자로 퍼서 직접 나눠줬습니다. 이때 기자들의 표정이란 마침 똑같은 심정을 피력할 글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김성재 에디터가 쓴 김치찌개 더 주세요라는 기자에 국민이 느낀 모욕감 입니다. 그러나 이 행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우선 음식을 나눠준 쪽이 이 나라 최고 권력자요 국정운영 책임자인 대통령이고 그 음식을 더 주세요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며 받아먹은 쪽이 그를 감시해야 할 기자들이어서 그렇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기자들을 불러 야외 잔디밭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고 수많은 기자들이 이 파티에 우르르 참석해 최고 권력자가 배식한 음식을 받아먹으며 박수를 치고 만찬을 즐겼습니다. 권력자와 권력 감시자의 관계가 정상적인가 이게 권력을 감시하는 기자의 모습인가2000년에는 김정환 사무국장의 권유로 민족문학작가회의 의 이사로 등재되어 2002년까지 이따금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김정환 시인은 내가 동부이촌동 입구의 강변에 있는 복지아파트에서 거주할 때 김사인 시인과 함께 소주병을 들고 가끔 들렀습니다. 김정환 시인은 당시 서부이촌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사에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는 5둘둘 사건으로 쟁쟁한 명성을 떨친 후배들 앞에서 어설픈 김수영론을 펼쳤던 것을 돌이켜보면 다소 쑥스럽다. 2005년 3월31일 언론중재위원회는 정기총회를 열어 조준희 전 사법개혁위원장을 위원장으로 선출했습니다. 나는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조 위원장은 민변 출신으로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일지 사건의 변호인단 가운데 일원이었으며 이부영 선배를 비롯한 동아투위 위원 여러 명과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우리 두 사람은 합이 잘 맞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무총장을 내부에서 발탁하자고 건의하자 조 위원장은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고 즉각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무총장은 청와대에서 점지해 낙하산으로 내려왔는데 실제로 문화일보에서 함께 근무했던 후배가 이때의 낙하산이었습니다. 딱히 그 후배가 아니라 누구더라도 거부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우연한 기회에 적지 않은 중재위원들 중에서 나를 부위원장으로 밀어올린 사람이 문화체육부 정동채 장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정치부 차장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을 지낸 한겨레 후배였습니다. 그러니까 나 역시 낙하산이었던 것입니다.
장군봉 아래에 모여 통일문학의 새벽 열어2005년 7월20일부터 25일까지 평양 백두산 묘향산에서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 참석자들은 7월20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북측의 고려항공 전세기 직항편을 이용해 평양 순안비행장으로 출발했고 25일 오후 고려항공 전세기 직항편으로 귀국했습니다. 남북작가대회에는 남측 문인 98명과 북측 문인 10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남측 대표들은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615공동선언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환영연회에 초대합니다. 장소 인민문화궁전 날짜 2005년 7월 20일 19시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라는 내용의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인민문화궁전 대회의실의 만찬식장에서 백낙청 615 공동행사 준비위 남측 상임대표는 분단의 엄중한 경계를 지우고 하나의 겨레말 작가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이 대회는 분단에 길들여졌던 문학적 상상력을 복원하고 민족의 상처를 치유하며 통일의 시대 우리 문학의 새로운 성취를 향한 중요한 자리라고 역설해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남쪽 대표들은 21일 만경대와 쑥섬혁명사적지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주체사상탑 개선문 평양 지하철 등 평양시내 주요 시설들을 둘러보았습니다. 22일에는 삼지연 및 백두산지구를 둘러보았습니다. 7월23일 새벽 5시 남과 북 해외문인 150여명이 백두산 장군봉 아래 개활지에 모여 통일문학의 새벽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삼지연 베개봉여관에서 새벽 2시30분에 버스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흰 구름 아래로 흰 구름이 보였습니다. 천지에 도착하니 맵찬 바람이 몰아쳤습니다. 20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채택한 공동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은희경 소설가 가 진행을 맡았습니다. 고은 시인이 베개봉여관에서 쓴 시 다시 백두산에서를 낭독했습니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워서 타고 왔던 버스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마침 울산의 정일근 시인이 따뜻한 음료를 주어 고맙게 마시며 몸을 풀었습니다. 7월24일 묘향산 보현사를 둘러보고 폐막 연회에 참석했습니다. 헤이리에서 헌책방 카페 운영언론중재위원회 회의에는 2006년까지 참여했습니다. 파주의 예술마을 헤이리에 입주한지 3년 지난 때였습니다. 강복영 서예가 다음인 두 번째로 입주했습니다. 막상 헤이리를 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언호 선배보다 먼저였습니다. 지금은 헤이리에 카페 레스토랑을 비롯한 다양한 업소들이 번거로울 정도로 많아졌지만 당시 북카페 반디 주변은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앞마당의 테이블들은 오래 전에 치워졌고 플라타너스는 여전히 서 있습니다. 이 나무를 소재로 마당의 플라타너스가 이순을 맞은 이종욱에게 라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북카페 반디는 헌책방 카페라는 슬로건을 내건 덕분인지 책을 살펴보고 가끔은 구입하는 손님들이 차를 마시는 손님보다 많다. 여러 해 전부터는 알라딘의 온라인중고 사이트을 통해 주문이 들어오면 책을 찾아 보내는 헌책방지기로 소일하고 있습니다.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은 교하도서관에서 빌려 본다. 2014년 7월에는 교하도서관에서 마련한 다섯 번째 파주 명사의 서재에 선정되어 포스터 추천도서 등과 함께 전시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 에는 안종필 안성열 위원에서 정연주 위원에 이르기까지 동아투위 위원이 다수 등장합니다.
15권에는 윤수경 여사 도 있습니다. 14권에 실린 이종욱의 전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산양인가 하면 아니다옛 연금술사의 도제인가 하면 아니다막 시를 쓰기 시작했다기자 노릇 그만둔 뒤팔레스타인 시인들의 시 번역하고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 시 번역했다제3세계 문학으로 향한 그의 고즈넉한 눈술자리에서차츰술꾼들의 소리 높아지는데그는 가만히 처음 그대로였다어쩌다가 웃을 일도 아닌데 싱긋 웃어 보이고배꼽을 잡고 웃을 일이나비분강개로 술상머리 내리칠 일에도그는 가만히 처음 그대로였다그렇다고 신선인가 하면 아니다어디까지나그는 구름 쓸어낸 하늘의 한쪽이었다안개 걷힌 바다 복판의 파도 골짜기였다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NH농협 301-0240-3680-71재단법인 자유언론실천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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